아담이 땅을 파고 이브가 실을 잣을 때,
신사가 어디에 있었나?
하지만 여성들은 거의 언제나 말이 없었다. 우리는 여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들어볼 수가 없다. 바스의 여장부가 불평했듯이, 모든 책은 남성이 쓴 것이었다.
39
사회적 미덕과 사랑이 긴밀하게 결합하고, 영감의 원천으로서 여성에게 높은 지위가 부여되는 것, 이것이 궁정연애의 개념과 실펀에 완벽하게 반영되어 있다. 기사도의 사랑은 종종 플라토닉한 것이었고, 사랑이 무한한 정신적 가능성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플라톤의 사랑 개념과 공통점이 많다. 이러한 플라토닉 사랑은 이탈리아 작가들, 가령 페르라르카와 단테에 의해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기보다 본질적으로 머리를 쓰는 인공적이고 규칙적인(precieux)인 것이며, 엄격한 규칙과 정교한 협약을 준수해야 하고, 나름의 율법적 체계를 갖고 있었다. 사랑의 정식화는 오비디우스에게 빚진 것이었고 논증을 좋아하는 보편적 기호와도 상관이 있다.
56
크리스틴 드 피산은 여성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당대의 행태, 특히 <장미의 로망>에 대해 아주 강력한 목소리로 항의하는 시들을 썼다.
...
남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참하게 보여 여자들의 사랑을 얻고 나중에 가서는 자신들의 정복을 뽐낸다는 것과, 한 여성이 신의 없는 것을 빌미로 전 여성을 매도하는 게 남자들의 일반적 버릇이라고 불평했다. 남자들은 툭 하면 여성이 나쁘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 여성 전체를 매도하는가? 어떤 천사들은 거만하여 타락했을 수도 있지만 모든 천사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도는 배신자였지만, 모든 사도가 배신자인 것은 아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남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명예롭게 생각해야 한다. 주로 학자들이 여성을 비방하는 사악한 책자를 쓴다.
...
그들은 여자보다 더 지독한 악마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살해하거나 도시를 파괴하지도 않았으며 사람들을 압박하지도 않았다. 왕국을 배반하거나 남의 땅을 차지하거나 독약을 먹이고 불을 지르지도 않았으며 거짓 계약서를 쓰지도 않았다.
...
중세에는 여성에 대해 한편으로는 완전 복종을 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숭배하는 양극단의 사상이 정식화되어 다음 세대에 유산처럼 물려지게 되었다.
67-68
사회적 위치는 이론적 개념에 의해서만 정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객관적 사실들의 불가피한 힘과 일상생활에서 쌍방의 타협 등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런 객관적 사실들이 만들어낸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아니었으며, 대체로 남녀 간에 형평을 이루는 것이었다.
중세의 남자는 여자 없이 일상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었다. 가정의 안락을 위해서 여성에게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집을 떠나 있을 때에는 여성이 그의 일을 대신 맡아 하였고, 그 어느 시대보다 중세의 여자들이 이런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실제로 남녀 간에는 동지의식 같은 것이 존재했다. 심지어 교회의 사제들이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 글을 쓸 때에도 이런 의식을 토로했다. 일찍이 피터 롬바르드는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남자의 통치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의 머리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또 노예로 만들어질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의 발바닥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동반자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의 옆구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의 여자들은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그런 동반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69
아내는 여성의 단 하나뿐인 절대적 유형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봉건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
상류층의 처녀에게 결혼의 유일한 대안은 수녀원이었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많은 여성들이 수녀원에서 훌륭한 경력을 쌓았다.
81
중세시대 남아있는 여성시인들이 대부분 수녀인 이유가 있다!
이론적으로는, 사랑의 유희를 벌이고, 비단 옷에 장식을 하고, 장기 게임이나 즐기는 낭만적이고 사랑스럽고 변덕스러운 기사도 속의 숙녀가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는 아주 달랐다. 열심히 일하는 아내, 적수들이 만만하게 대하지 못하는 여성이 있을 뿐이었다.
...
먼저 귀족 부인은 남편이 부재 시에 그를 대행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 귀부인은 영주의 권리가 침해받을 경우를 대비해 토지법이나 봉건법을 잘 알아야 하고, 영지의 관리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여 관리자를 감독할 수 있어야 하며, 가정주부답게 비용 지출을 현명하게 계획할 수 있어야 한다. 크리스틴은 귀부인의 예산이 다음 다섯 가지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1) 자선 기부 행위 (2) 가정 내 비용 (3) 고용한 직원들과 여자들의 봉급 지불 (4) 선물 (5) 보석, 드레스, 기타 잡비
남편의 지위에 맞게 수입을 현명하게 지출하는 것은 아내의 책임이었고, 알뜰하게 관리하는 일이 소작료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
여성이 남편 유언의 단독 집행자로 지명되거나, 혹은 다른 공동 집행자와 함께 그것을 처리한 사례를 많은 문헌에서 보았다.
85
수많은 파티만 나오는 판타지 소설이 스쳐가는군... 실제 역사에서는 달랐다는 사실을 알게되니 통쾌하다.
중세에는 공적인 전쟁이든 사적인 전쟁이든, 영주가 출타하여 부인이 성을 지킬 때에 공격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이처럼 혼자 성을 지켜야 하는 아내는 때때로 아주 능숙한 수성자(성을 지키는 사람)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전쟁은 이런 부인 두 명을 전면에 부상시켰다. 부칸 백작부인은 에드워드 1세를 상대로 하여 버릭성을 지켜냈다.
...
1461년의 특허 등기부는 우리에게 보크넘 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왕은 법적 심사를 내세워 성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지만, 성주인 니베트 부부는 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왕은 법적 절차의 이행을 위해 9명의 집행관과 1명의 몰수 관리관을 성에 파견하였다.
그들이 성의 외곽에 도착했을 때 성의 개폐교가 올라가고 존 니베트의 아내인 앨리스가 개폐교 뒤쪽의 망루에 나타났다. 그녀 뒤에는 투석기, 장창, 쇠막대, 곤봉, 기타 전쟁 무기가 배치 되어 있었다.
88-89
멋지다...
장원에서 경작한 옥수수를 갈아서 집안의 제빵실에서 빵을 만들고 집안의 양조장에서 술을, 집안의 목축장에서 치즈와 버터를 만들어야 했다.
고기 저장소에서 촛불을 만들고 베이컨을 훈제했으며 겨울용 고기를 소금에 절여야 했다. (,,,)
장원의 안주인은 음식과 옷감 만드는 것을 감독하고, 시장이나 가까운 상점이나 도시 상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미리 구입해놓고, 때로는 런던이나 기타 대도시 혹은 스타우어브리지, 보스턴, 윈체스터, 세인트 이브스 같은 연례 대시장에서 (...)
90
중세에는 기본적인 식생활이나 의류까지 모조리 자급자족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냥 버터랑 베이컨 얘기가 나오니까 배고팠다...
중세 후반에 아내들이 남편의 일을 돕는 경우가 많았고 죽은 남편의 일을 맡아하는 과부들도 많았다. (...)
이런 식으로 과부가 떠맡은 일들은 대규모 상인의 일, 배의 운송, 왕실과의 거래, 소규모 직공의 일 등 다양했다. 대규모의 중요한 사업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업무 지식과 능력이 필요했다. 이런 일을 맡아서 하는 과부들은 유능할 뿐만 아니라 복잡한 해외 무역 관계에서도 자신의 주관을 뚜렷하게 견지하는 씩씩한 여성들이었다.
106
여자 아이들은 남자 아이들처럼 장인의 도제로 들어갔다. (...) 상류 계급의 아버지가 지참금을 챙겨 딸을 시집보내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수녀원에 입회시켰듯이, 도시 장인들도 지참금을 챙겨 딸을 시집보내거나 아니면 도제로 받아서 자신의 일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110
보통 도제는 계약 기간 중 결혼을 하지 않고, 술집에 자주 들락거리지 않으며, 주인의 비밀을 남에게 말하지 않고, 계약 기간 중 연간 6펜스 이상의 돈이 드는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112
도제 기간을 마친 여자들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 기술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고, 팜므 솔르(femmes soles)로 지정되면 그 지위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미혼 여성들이 장인 활동을 계속 했고, 많은 기혼 여성들이 결혼 후에도 남편과는 별개로 장인 활동을 계속 했다.
113
여성 장인들에게 독자적인 사회적 지위가 암묵적으로 주어진 사회였다. 여성 장인의 일은 남편과 별개의 활동으로 간주되었으며 법정에 설때도 독자적으로 섰다고 한다.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장인의 아내와 딸은 제외)와의 경쟁에 대하여 질투한 흔적도 엿보인다.(...)
1461년 브리스톨에서는 위버들이 아내, 딸 하녀 이외의 여성들을 고용함으로써 "왕에게 충성을 바쳐 전쟁에 나가고, 이 나라를 지키며, 직조 기술을 충분히 익힌 남자들이 실업자로 전락하여 생계가 막막하다."는 소청이 법원에 접수되었다. 결국 위버들은 자신의 생계비용을 벌어야 하는 여성을 제외하고 다른 여성들을 고용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이 났다.
여자들을 고용하지 못하게 하는 표면적인 까닭은 어떤 일은 여성이 하기에 너무 힘들어 부적합하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는 질투심 때문이었다. 이는 4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현대 여성들의 취업을 가로막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일을 해도 여자의 임금은 남자보다 낮았고, 남자들은 여자의 값싼 노동력이 치고 들어와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115-116
아일린 파워는 한세기 전의 인물인데 정말 통찰력이 대단하다 느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하나의 기술 직업에 종사한 반면, 여자들은 두세 가지의 부업을 겸하는 경우가 흔했다. 여자들만의 길드를 조직하지 못하게 하는 주된 이유가 이처럼 두세 가지 일을 하면서 부수입을 올리는 것 때문이었다.(...)
우리가 여성의 부업에 좀더 관심을 갖는 이유는, 여성들의 부업을 통하여 국가의 경제생활에 아주 중요한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119
초서는 소박하면서도 검소하고 그러면서도 편안하지 못한 존재를 묘사하고 있다.이처럼 농사 일을 하는 여성들은 종종 아주 힘든 삶을 영위해야 했다. <성스러운 처녀 Holy Maidenhead>라는 논문은 시골 노동자 아내가 겪는 시련을 심각하게 때로는 희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논문의 저자는 사회 모든 계급을 막론하고 결혼 생활은 아주 힘들며 차라리 수녀가 되라고 권하고 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아내의 처지는 아주 고달프다. 내 얘기를 한번 들어보라. 그녀가 집안에 들어오면 아이는 빽빽 울고 고양이는 베이컨을 먹으려고 달려든다.
개는 살코기를 날름하려고 하지, 송아지는 우유를 다 핥아버릴 기세고, 냄비는 끓어 넘쳐 불이 나려고 하지, 무심한 남편은 욕이나 해대지. 아주 기이한 얘기가 되겠으나 처녀들이여, 강력하게 결혼을 말리고 싶다. 결혼해서 잘 해내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23)
132
어느정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장인과 달리 농사일은 많이 힘들었구나
반면에 농촌 여성들이나 집안의 하녀들은 거의 대부분이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다. 교구 신부가 이들에게 최소한의 종교 지식을 가르쳤겠지만 이들이 성경을 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
여기서 한 특별한 지식 분야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모든 여성은 가정 의학에 대해서 뭔가 좀 알고 있는 것으로 기대되었다. 여성들만을 위해 집필되고 번역된, 여성 질병 관련 논문들이 여러 편 존재한다. 이런 책이 집필된 것은 여성들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여성이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의원 개업을 하고 또 아마추어 이상의 기량을 발휘하면, 즉각 남자 의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19세기에 여성이 의료계에 진출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던 현상의 예고편이었다. 여성들은 당연히 면허증이 없었고 그런 만큼 의학에 대한 지식이나 훈련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저런 곳에서 여성이 의사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은 경우가 있었다.
...
그녀는 여의사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많은 여자들이 남자 의사에게 환부를 내보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웅변에도 불구하고 의원 개업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자클린은 예전의 금지 조치와 벌금 부과를 무시했던 것처럼 이후에도 계속 의료 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파리에서 불법으로 의료 행위를 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재속 수도녀이지만 유부녀인' 조안나, 유대인 여자 벨로타, 이프르의 마가렛 등이 이 당시 외과의사로 활약하다가 금지 조치를 당했고, 1322년과 1331년 사이에 많은 다른 여성들이 이와 유사한 고발을 당했다.
156-159
중세에 마녀사냥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이처럼 가정의학에 통달한 여성들에 대한 제재가 극에 달한 탓 아닐까? 근데 경고 받고 벌금을 내고서도 계속 의료활동을 이어나간건 진정한 의료인 정신인것 같다!
수녀원은 한편 귀족 부인들과 과부들의 하숙집 역할도 하였다. (...) 때때로 과부가 수녀원으로 은퇴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도 했다. 이런 부인은 상류층 여인이나 하녀를 수행원 혹은 동무로 데려와 수녀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수녀들은 귀부인들의 예쁜 옷차림을 따라하고 데리고 온 애완견을 보고 개를 기르고, 그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116
수녀들이 세속의 여인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는 한, 세속의 패션을 금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때로 절망에 빠진 어떤 주교는 수녀들이 입어서는 안되는 옷들, 다시 말해서 최신식 유행 패션의 목록을 만들어서 회람시키는 엉뚱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수녀들의 옷차림과 관련하여 공의회가 엄숙하게 열렸고, 주교와 대주교들은 황금빛 헤어핀과 은제 벨트, 보석 박힌 반지나 레이스 달린 구두, 윗부분이 트인 상의, 목이 훤히 드러나는 옷과 기다란 옷자락, 화려한 색과 값비싼 천, 모피 등은 절대 안 된다며 반백의 머리를 흔들었다.
178
주교들은 애완동물이 영성 훈련에 방해가 된다고 보아 여러 세기 동안 수녀원에서 추방시키려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수녀들은 주교가 떠나기만을 기다렸다가 그들이 수녀원 문을 나서는 순간, 휘파람을 불어 강아지들을 불러들였다. 애완 동물 중 강아지를 가장 선호하였고, 원숭이, 다람쥐, 토끼, 새 등을 키우기도 했다.
178
수녀들에게 인기 많았던 강아지ㅠㅠㅠㅠ 역시 강아지파가 승리했다
1300년에 교황은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회칙을 반포했다. '수녀들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녀원을 떠나서는 안 되며 속인은 특별한 허가나 합당한 이유 없이 수녀원에 들어가거나 수녀들을 방문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회칙을 단 5분이라도 지킨 수녀는 아무도 없었다.
링컨 교구의 한 수녀원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주교가 수녀원을 방문하여 보니파키우스 교황의 회칙을 한 부 전하면서 수녀들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수녀들은 격분하여 주교가 말을 타고 수녀원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 따위 규정은 지킬 수 없다고 소리치며 회칙을 집어던져 주교의 머리를 맞혔다.
179
회칙을 단 5분이라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나 주교 머리에 회칙 던지는게 너무 웃겼다... 인간은 달라진 것이 없구나...ㅋㅋㅋㅋㅋ
정말 재미있게 읽은 역사 책이었다. 이 책은 아일린 파워가 중세 생활에 대해 쓴 에세이 3개를 합친 것인데 하나같이 알차고 재미있었다. 그들의 생활에 밀첩하게 접근해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여성들의 중세 생활과 위치에 대해서 무지했는데 알려진 것과 다른 부분이 많았으며 그들이 독자적으로 생활하기도, 알려진대로 힘들고 고된 삶을 영위하기도 했음을 알게 되었다. 중세시대 역사를 좋아하는 내게 정말 뜻깊은 책이었으며 소장하길 잘한 책! 주위에 마구마구 추천해주고 싶다!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웃기도 했고 그때를 살아갔을 여성들을 생각하며 뭉클해졌다.
+.요약했던 것
장원제->자급자족 필수->안주인 관리: 집안일, 작물 키우기, 옷 실감, 고기 훈제, 낙농장
95p. <파리의 가부장> 노인이 어린 아내가 재혼할 것을 위해 가정주부가 관리해야 할 것들을 적은 책. 하인들의 관리법, 손님 대우법, 토지 등 전반적인 안주인의 일이 상세하게 적혀있음
108p. 1274년 상인 백인 명부: 대규모 양모 상인 중 런던 과부 이사벨라 버크렐을 포함한 여자들이 많이 있음. 상업에 종사한 대형 상인 여성들이 많았음
중세 여성 직업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브류스터(양조자)랑 베이커리스,박스터(빵) 도소매할때 과도한 보수 요구나 제빵규정 위반해서 고소당하는거 왜 이렇게 웃기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농부의 집안에서는 남녀가 더 평등했고 서로에 대해 동료애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차별이 심했던 것은 최상,최하 계급을 제외한 중산층.
여성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방법 1) 수녀원 (남학교도 있었음) 2) 귀족의 수행원 3) 도제 제도 4) 농촌 학교(잘 알려진 것이 없다)
중세 초기 수녀원은 교육 수준이 매우 높았다. 기본 의사소통 언어가 라틴어였으며 뛰어난 학문적 연구소였음
후대 (13-15c)에 들어 교육수준이 낮아지며 14c에는 라틴어, 15c에는 프랑스어가 차차 사라져 모국어만 사용하게 되었다.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미의 이름-상> 움베르토 에코 독후감, 인상깊은 구절 (2) | 2024.11.18 |
---|---|
<모파상 단편선> 기 드 모파상 인상깊은 구절 (0) | 2024.11.16 |
<좁은문> 앙드레 지드 독후감 인상적인 구절 (1) | 2024.11.14 |
<드라큘라> 브람 스토커 독후감 인상적인 구절 (3) | 2024.11.13 |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5 <푸아로 사건집> 독후감 인상적인 구절 (4) | 2024.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