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 내가 속으로 말했다.
문이, 옥스퍼드에서 추구하고 찾아냈던 담장의 낮은 문이 닫혔다. 이제는 열어 봐도 마법의 정원은 발견하지 못하리라.
나는 해저의 햇빛이 들지 않는 산호 궁전들과 너울거리는 해초 숲에서의 오랜 포로 생활을 마감하고 해수면으로, 평범한 한낮의 햇살과 신선한 바다 공기로 올라왔다.
나는 등지고 떠났다. 무엇을? 청춘을? 청년기를? 로맨스를? 이것들의 마술 도구, '젊은 마술사 세트'를, 제자리에 놓인 흑단 마술 지팡이 옆으로 현혹하는 당구공들, 두 겹으로 접히는 페니 동전, 잡아당겨 속이 빈 양초로 둔갑시킬 수 있는 깃털 꽃송이들이 담긴 그 조촐한 상자를.
"나는 환상을 등지고 떠났다." 내가 속으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삼차원의 세계에서 살아가리라, 내 오감에 의지해."
그 이래로 나는 그런 세계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 차가 방항을 틀어 저택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에는 그런 세계가 찾을 필요도 없이 저 길 끝에 다다르면 온통 주변에 쳘쳐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283
렉스는 그냥 온전히 거기 있지를 않았어. 절대 온전한 하나의 인간이 아니었어. 그 사람은 한 인간의 부자연스럽게 발달된 작은 조각이었어. 병 속의 무언가. 실험실에서 살아 있게끔 보관되는 장기였어. 나는 그 사람이 무슨 원시적 야만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 섬뜩한 시대만이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완전히 현대적이고 최첨단인 어떤 존재였던 거야. 전체인 체하는 남자의 작은 조각.
뭐, 이제는 다 끝났지만."
대서양의 폭풍우 속에서 줄리아가 이 이야기를 내게 해 준 것은 십 년이 지나서였다.
332
엄마는 성녀 같지만 성녀는 아니었잖아. 아무도 성녀를 진짜로 싫어할 수는 없잖아? 하느님을 진짜로 싫어할 수도 없고, 하느님이랑 성자 성녀를 싫어하고 싶을 때는 그들과 비슷한 무언가를 찾아서 그게 하느님인 양 여기고 그걸 싫어하는 거야.
366
"사랑하면 내가 세상을 싫어하게 되는 건 왜일까? 사실 반대의 효과를 내야 하는 거잖아. 마치 전 인류가, 하느님까지도 우리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듯한 느낌이야."
"꾸미고 있지, 꾸미고 있고말고."
"하지만 그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을 쥐었잖아. 지금 여기서 우리는 그 행복을 손에 넣었으니까. 그들이 우리를 해칠 순 없는 거겠지?"
"오늘 밤만큼은, 지금만큼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밤만큼?"
450
"난 가끔 과거와 미래가 양쪽에서 너무 세게 죄어 와 현재가 들어설 자리란 아예 없다는 느낌이 들어." 줄리아가 말했다.
457
죄악.
이 단어를 안 건 옛날 옛적. 호킨스 보모 할머니가 난롯가에서 바느질하고 종야등이 성심 앞에서 타오를 적. 코딜리아와 내가 일요일 오찬 전에 엄마 방에서「교리 문답」을 볼 적, 엄마는 내 죄악을 품고 성당에 가서 예배당에서 내 죄악과 검은 레이스 면사포 아래 고개 숙이고. 런던에서 등불이 밝혀지기 전에 내 죄악을 품고 빠져나오고. 우유 배달부의 조랑말들이 인도에 앞발을 디딘 텅 빈 거리 사이로 내 죄악을 짊어지고 가고. 엄마는 자신의 치명적인 병환보다도 더 잔혹하게 스스로를 갉아먹는 내 죄악으로 죽고.
엄마가 내 죄악으로 죽고. 예수가 손과 발이 못 박힌 채 내 죄악으로 죽고. 야간 육아실의 침대 위에 매달리고. 팜 스트리트 성당의 어둡고 작은 서재에 빛나는 유포를 걸치고 매해 매달리고. 늙은 청소부만이 먼지를 털고 촛대 하나만이 타오르는 어두운 성당에 매달리고. 정오에 군중과 군인들 사이에서 드높이 매달리고.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과 죄수의 상냥한 말들 말고는 아무 위안도 없이. 영원히 매달리고. 서늘한 성묘(聖墓)와 석판에 펼쳐진 수의는 결코 없이, 어두운 안치소 안의 향유와 향료도 결코 없이. 언제까지나 정오의 햇볕은 내리쬐고 통으로 짠 속옷을 차지하려 주사위가 딸각거리고.
469-470
우리는 등 뒤의 창문을 닫았고 목소리가 그쳤다. 달빛이 테라스 위에 흰서리처럼 내려앉았고 분수의 음악이 우리 귓속으로 기어들었다. 테라스의 석재 난간은 트로이의 성벽이었을지도, 고요한 정원은 그날 밤 크레시다가 누운 그리스군 막사가 쳐진 야영장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며칠, 몇 달은 남았을까."
"낭비할 시간이 없어."
"월출과 월몰 사이에는 일평생이. 이후에는 암흑이."
480-481
'어쩌면 우리네 사랑은 모두가 다만 전조와 상징일지 모른다. 다른 이들이 우리보다 앞서 밟아 간 지친 길을 죽 따람 ㅜㄴ설주와 포석 위에 휘갈겨 쓰인 나그네의 언어일지 모른다. 어쩌면 너와 나는 예표(豫表)이며 이따금 둘 사이에 덜어지는 이 슬픔은, 우리가 탐구하다가 서로가 상대의 안으로 너머로 비집고 나아갈 때, 항상 우리보다 한두 걸음 앞서 길모퉁이를 도는 그림자가 간혹 가다 언뜻 보일 때 느끼는 낙담에서 솟아나는 것일지 모른다.'
494
모두가 오빠의 음주 습관을 알 거야. 오빠는 달마다 이삼 일쯤은 사라질 테고, 그럼 그 사람들이 전부 끄덕이고 웃음 짓고 각기 다른 억양으로 이렇게 말하겠지. '서배스천 그 친구 또 들이부었구먼.' 그러면 오빠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창피한 얼굴로 돌아와서 예배당에서 하루 이틀 정도는 더 독실하게 행동하겠지. 어쩌면 정원 여기저기에 작은 은닉처들을 찾아내서 한 병 숨겨 두고 이따금씩 몰래 꿀껏할 거야. 수도원에서는 영어권 방문객이 올 때마다 오빠를 안내역으로 내보낼 거고, 오빠가 더없이 매력적으로 행동한 나머지 방문객들은 떠나기 전에 오빠에 관해 물을 테고 본국에선 높으신 분들과 친인척 관계라고 귀뜨미받을지도 모르지. 오빠가 충분히 오래 살면 온갖 외딴곳의 선교사들이 대대손손 오빠를 두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들 학창 시절 희망의 일부였던 기묘한 할아버지로 생각하고, 미사 때 기억할 거야. 오빠에게는 예배 시 사소한 기벽이, 자기 나름의 진지한 개인적 의식이 생겨날 거야. 또 뜬금없을 때 예배당에서 보이고 오리라고 예상될 때에는 안 보이겠지.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오빠의 평소와 같은 음주 발작 다음에 정문에서 죽어 가는 오빠를 사람들이 둘러업고 올 테고, 눈꺼풀이 떨리는 정도의 의식이 붙어 있다는 게 보일 때 오빠에게 종부 성사를 내릴 거야. 한평생 살면서 그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지, 뭐.
503
이로써 전망이 열렸다. 내가 처음 서배스천과 본 모습처럼 대로 모퉁이에서 얻은 전망이, 외진 골짜기, 하나 아래 다른 하나가 굴러떨어지는 듯한 호수들, 전경의 고가(古家), 버려지고 잊힌 나머지 세상만사라는 전망이, 평화와 사랑과 아름다움이라는 자기만의 세상이. 낯선 야영지 속 한 군인의 꿈이. 어쩌면 광야에서 단식한 낮과 자칼에 시달린 밤 뒤에 펼쳐진 높은 성전 꼭대기와도 같은 전망이. 내가 이따금 그런 상상에 사로잡혔다고 해서 스스로를 꾸짖어야만 하는가?
525
그 어두컴컴한 사무실 안에서 아무도 '전쟁'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단어는 금기였기에. 우리는 만일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소환될 예정이었다.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된 행위인 적대 상황이 발생할 경우가 아니라, 노여움이나 웅징만큼이나 명쾌하고 단순한 상황도 아니라, 긴급 상황 시에, 물속에서 드러나는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얼굴과 심해에서부터 끌어 올려 후려치는 꼬리를 가진 괴수가 나올 때에.
539
죽음의 언저리에서 그는 어쩌면 죽음과 비슷하기에 어둠과 고독을 두려워했다. 그는 우리가 방에 있는 것을 좋아했고 금박 입힌 조각상들 사이에서 밤새도록 불빛이 타올랐다.
540
마치멘 경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전락하여 어떻게 쓰일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옛 성의 석재들로 새 집을 지었다. 해해연연, 대대손손 그들은 집을 보강하고 증축했다. 해해연연 대정원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목재가 무르익어 갔다. 그러다가 급작스레 서리가 닥치고 '후퍼'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에 저택은 황량해지고 작품은 전부 영락했다. 아, 그렇듯 붐비던 도성이 이렇게 쓸쓸해지다니.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565
건축가들의 어떤 의도와도 매우 동떨어진 무언가가 그들의 작품에서, 내가 배역을 맡은 이뉴르이 끔찍한 작은 비극에서 탄생했다. 당시에 우리 누구도 생각지 않았던 무언가가. 바로 작고 붉은 불꽃, 성궤의 두드려 만든 구리 문짝 앞에 재차 점등된 개탄스러운 디자인의 두드려 만든 구리 성체불이. 옛 기사들이 자기 무덤에서 보았고, 꺼지는 것을 보았던 불꽃이. 그 불꽃이 고향에서 멀리, 심적으로는 아크레나 예루살렘보다 멀리 온 다른 전사들을 위하여 다시금 타오른다. 건축가들과 비극 배우들이 아니었다면 점등되지 못했을 불꽃을, 그곳에서 나는 오늘 아침 옛 석재 사이에서 새로이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565
올해 읽은 최고의 책으로 등극하다...
사실 1부와 2부는 그냥 영국 상류층의 동떨어진 추억회상으로 느껴졌는데 3부부터....
휴유증이 아직도 안가시고 독후감 쓰는 지금도 와우,,,
인생과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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